예전에 어디에선가 그런 이야기를 본 적이 있습니다. 게임이 끝을 향할수록 4위는 얌전해지는 것이 매너다. 4위가 허투른 1판역 따위로 올라버려서 게임을 끝내서야 2위가 1위를 쓰러뜨리고 역전할 기회를 앗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1위와 2위의 치열한 싸움을 구경할 수 없기 때문이다, 3위와 4위는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는 순위이니 얌전히 1위와 2위의 승부에 길을 내어주는 것이 매너라는 글이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저는 그 말에 하나부터 열까지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이를 다시 생각해보고 논리적으로 풀어내는 데에 몇달이 걸렸지만, 이제는 어째서 그 말에 동의할 수 없는지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그 주장의 논리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1. 작탁에 앉는 사람은 순위에 관계없이 모두 언제든 오를 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는 사람에게 그 누구도 뭐라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비난해서도 안됩니다. 정당한 권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서 그 권리를 함부로 빼앗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정당화될 수 없는 법입니다. 그 정당한 권리를 포기할 수 있는 것은 당사자들 뿐이고, 매너라는 이름 뒤에 숨어서 다른 이들이 강요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2. 그 1판으로 인한 승리가 큰 것인지 작은 것인지를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는 점도 있습니다.
2위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흘러가는 1국은, 특히나 게임이 막판으로 치닫는 와중에서, 매우 아깝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1위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흘러가는 1국은 매우 중요할 수 있습니다. 순위의 변동이 없더라도 그렇게 한번이라도 화료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4위에게 큰 위안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만약 3위가 한번도 쏘이지 않고, 한번도 오르지 못한 상태라면 이 화료는 3위를 부끄럽게 할 수도 있습니다.
마작에는 소위 "야끼도리"라는 용어랄까, 놀림이 존재합니다. 동장 4국이든 남장 8국이든 게임이 끝날 때까지 한번도 화료하지 못한 작사를 놀리는 말입니다. 그 이외에도 어떤 벌칙이 존재하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하지만 그 멸칭 자체만으로 상당히 부끄러운 사실임에 틀임없고, 그런 멸칭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화료라는 행위가 그 점수에 상관없이 갖는 의미를 상징한다고 생각합니다.
3. 그 작은 승리 역시 게임의 일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언급한 예입니다만, 4위가 한판으로 화료하면서 올라버린 그 1국은 1위에게는 더할나위없이 중요할 수 있습니다. 만약 1위와 2위의 점수차가 몇백점 단위이고, 1위가 오야인 상황에서 4위가 쯔모로 화료했다면, 그 한판으로 1위와 2위가 바뀔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게임을 바꾸는 상황이 아니라 하더라도, 1국이 흘러가 버리는 것은 1위의 승리를 조금 더 확실하게 하고, 2위를 조금 더 불안하게 하며, 3위를 조금 더 의기소침하게 합니다. 그로 인해 3위는 완전히 게임을 포기할 수 있고, 2위는 조금 더 무모해질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흘러간 1국은 이후의 게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고, 이 역시 마작의 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작탁에 앉는 사람들에게 각각의 화료가 갖는 의미는 단순히 점수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흘러가는 국 역시 작사의 심리 상태에 영향을 주고, 이는 이후의 게임의 전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칩니다. 심지어 관련 서적들에서는 작사가 자신의 게임 성향을 드러내어 인상을 심어주고, 이를 이용하는 법까지 설명하고 있기도 합니다. 4위는 얌전해야 한다는 주장은 마작을 순위와 점수로만 보는 좁은 시야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작은 점수와 순위로 모든 것이 귀결되는 게임이기는 하지만, 거기에 도달하는 과정은 블랙박스에 가까울 정도로 복잡하고 난해하므로, 그 중간 과정에서 점수와 순위로 매너를 규정하는 것은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생각이라는 의견입니다.
이제부터는 그 주장이 틀리다는 간단한 사례들을 몇가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 Scenario-1 ]]==========
1위가 압도적이지 않아 2위에게 아직 뒤집을 가망이 보이는 상황. 4위가 리치를 합니다. 1위와 2위의 입장에서는 손패가 무엇인지 도저히 예상이 가지 않습니다. 아무리 작탁을 잘 읽는 작사라도 우라도라가 낄 수 있는 상황에서는 역을 예상하기 힘든 법입니다. 만약 1위, 2위, 3위까지의 각각의 점수차가 얼마되지 않는 상황이라면, 당연히 이 리치로 4위의 순위는 바뀌지 않겠지만, 게임은 순식간에 흥미진진해집니다. 4위의 리치는, 비록 현재는 리치 한판 짜리 역이라도 얼마든지 게임을 재미있게 만들 수 있습니다.
==========[[ Scenario-2 ]]==========
남 3국에서 4위가 허투른 한판역으로 1국을 보내버렸습니다. 2위는 울컥했고, 3위는 좌절했습니다. 남 4국에서, 좌절한 3위는 대충 울어 텐파이하고 오야인 2위가 텐파이해주기만을 바랍니다. 그런데 기분이 상한 2위는 공격적으로 게임에 임하다가 다마텐하고있는 1위에게 크게 쏘이고 맙니다. 2위와 3위가 바뀌고 게임은 끝납니다. 남 3국에서 4위가 허투로 오르지 않았다면 게임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을지도 모르지요.
들려드린 예시들이 허무맹랑한 것이고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씀하실 분은 많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한번 정도 보았다는 분이 훨씬 많지 않을까 합니다. 흘러가는 전체 게임의 1/4, 혹은 1/8은 보이는 것 이상의 큰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 주장이 맞다고 할 경우에 3위와 4위가 놓일 상황을 상정해보면서, 그 주장의 잘못된 점을 짚어보겠습니다.
만약 저 주장대로라면 남 3국, 남 4국에서 큰 역이 손에 잡히지 않는 이상 3위와 4위는 승부에 참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작탁을 떠나서도 안됩니다. 이는 그야말로 매너가 아닙니다. 대놓고 쯔모기리 하고 있을 수도 없습니다. 자신이 건성으로 임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은 일반적으로 같이 놀고있는 다른 분들을 기분 상하게 하고, 따라서 이는 매너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3위와 4위는 판을 뒤집을만큼 큰 수만을 무모하게 노려야 하는데, 또한 이에 매우 열정적이어야 합니다. 당연히 가망은 거의 없지만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저는 앞서의 게임이 잘 풀리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작사에게 이런 심리상태를 강요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라고 좀처럼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도리어 이것이 매너라고 강요하는 시점에서 이미 자연스러운 게임의 흐름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생각이 1위만을 기억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1위는 매우 중요하고, 2위는 그 1위를 아직 차지할 수 있으니 매우 중요하지만, 그런 가망이 보이지 않는 순위들은 매우 중요한 1위를 위한 싸움을 위해서 자리를 내어주라는 주장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부분은 이 포스팅의 핵심을 벗어나고 있고, 아직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 다소간의 비약이 있을 수 있는데다가, 다소 정치적인 색채마저 띌 수 있어서 여기서는 깊게 논의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요컨대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마작의 의미를 각 화료의 점수에 국한하지 않고 국의 흐름으로 보게 되면, 모든 화료와 심지어 유국마저도 각각의 의미를 가지고 있고, 이는 획일적인 하나의 기준으로 가치를 계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최종적인 순위는 4명의 작사의 경쟁과 조화의 결과로 만들어지는 것이고, 각각의 화료와 유국은 모두 그 각각의 작사에게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따라서 특정 순위의 특정 화료만을 두고 가치가 있다 혹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각각의 작사가 자신의 목표를 향해서 노력하는 것을 매너다 아니다라고 판단할 일반적인 기준 역시 있을 수 없습니다.
※ 글쓴이는 정통으로 마작을 배운 것이 아니고 어깨너로 보고 독학으로 배운 것이므로 상기의 주장은 통설에 맞지 않는 것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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